Plant Theater
: 식물이 자라는 극장
류지민, 서예원
Ryu Jimin, Seo Yewon
2024. 10. 02 ~ 2024. 10. 23
Introduction
- 𝙋𝙡𝙖𝙣𝙩 𝙏𝙝𝙚𝙖𝙩𝙚𝙧 : 식물이 자라는 극장 -
류지민(@ryujimiiiiin, Korea), 서예원(@oakjeongyeunjae, Korea)
히피한남 갤러리는 10월 2일부터 류지민 작가와 서예원 작가의 2인전 <𝙋𝙡𝙖𝙣𝙩 𝙏𝙝𝙚𝙖𝙩𝙚𝙧 : 식물이 자라는 극장>을 선보입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동양화를 전공한 두 작가가 현대적인 시각으로 담아낸 동양화의 색다른 모습을 다양하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또한, 지속 가능한 재료를 바탕으로 창의적인 오브제와 공간 설치 작업을 선보이는 테서렉트와의 협업을 통해 더 독창적인 전시 경험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The Hippie Hannam Gallery is delighted to present a duo exhibition of artists Jimin Ryu and Yewon Seo, <𝙋𝙡𝙖𝙣𝙩 𝙏𝙝𝙚𝙖𝙩𝙚𝙧> starting from October 2. In this exhibition, you can explore unique interpretations of traditional East Asian painting created by these two artists, who have developed this style in a modern way. Additionally, through collaboration with the team ”Tesseract“, who focuses on sustainable materials, you will experience more creative and unique exhibition experience.
<식물이 자라는 극장 Plant Theater>
두 작가의 그림에는 식물이 가득하다. 서예원의 그림에는 정체 모를 풀이 덩어리진 모습이 연극 적으로 그려져 있는가 하면, 류지민의 그림에는 방치된 듯한 잡초가 몽환적으로 그려져 있다. 사 람은 드물다. 사람이 드문, 빈 곳에서 이들이 식물을 키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니 그것보다, 이 빈 곳은 도대체 어디길래 식물이 무성하게 자랐는가?
- 정영수 비평가
Artwork
Installation View
Press
Critical article
이상한 소리와 이상한 문
서예원은 “굉음과 미음은 평면 안에서 공평하다”라고 말하며, 평면을 악보처럼 다룬다. 그가 평면 위에서 기묘한 모양의 풀, 매캐한 연기, 클래식 연주에 사용되는 악기 등을 배치할 때, 소리가 낯선 방식으로 겹 쳐서 들리는데, 아마 그건 소리를 들어보자는 작가의 분명한 제안(펑, 이라는 제목, 음악을 암시하는 기호 들) 덕분인 것 같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회화에는 소리가 없다. 회화는 시끄러울 수도 없고, 고요 해질 수도 없으며, 다시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도 없다. 그렇다면 작가가 여러 소리를 ‘공평하게’ 배치한 다고 할 때 우리가 눈여겨봐야 하는 건, 정말 그 소리가 무엇인지보다도, 이 공간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뒤에서 밝힐 테지만 이 소리는 사실 실체가 없는 소리, 그렇기 때문에 더 의미 있는 소 리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에는 이상한 문이 있다.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는, 눈에 띄는 색의 납작한 문인데, 사실 그것 이 어디로 통하는지 알아내는 것보다도 문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여기서 문은 왕래 가능성, 즉 탈출 (어느 쪽이든)과 진입(역시 어느 쪽이든)을 뜻할 수도 있지만 회화에서 꼭 왕래를 염두에 두기 위해 문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모든 회화는 그리는 순간 즉각적으로 방문 가능한 공간이 되는데, 그 건 그림이 창문이자 문으로 기능한다는 뜻이므로 왕래 가능성을 위해 문을 그린다는 건 어색하다. 그렇다 면 문은 열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문은 연극 장치의 일부가 아닐까? 이것이 그림 자체를 얇은 벽으로 만들어버리는 표면의 문이라면, 문은 자신이 속한 곳이 가상이고 허구라는 것을 분명히 알려준다. 이 이상한 연극, 연극 장치를 숨기지 않은 연극에서 아마 주인공은 이상한 모양의 풀인 것 같다. 이 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낼 때 그 주위로 다양한 사물들의 소리가 겹친다. 또는,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풀 이 다른 사물의 소리를 억제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공평한 소리, 억제된 소리, 큰 소리와 작은 소리가 평면 위에서 복잡하고 아름답게 교차하는 소리가 서예원이 만드는 소리다. 그러나 다시 한번 떠올 려보자면 이것은 단순한 연극이 아닌, 연극임을 계속 알려주는 연극이기 때문에 이 소리는 실제로 들리는 소리, 작가의 원체험이라기보단 하나의 제안에 가깝다. 없는 소리, 허구의 소리를 함께 들어보자는 제안이 다. 이 불가능한 제안 앞에서는 관객과 작가가 모두 공평하다. 환영 없는 환영이 어른거린다. 각자 다른 소리를 들으면서도 무언가 공유된다.
_ 글 (정영수 비평가)
여기는 어디도 아니다
류지민은 잡초, 혹은 이름 모를 풀들이 웃자란 장소를 감각적으로 그린다. 언뜻 과거를 회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가 하면, 미래의 어떤 순간, 아직 오지 않은 꿈을 그린 것 같기도 하다. 흐린 톤이, 몽상적인 빛이, 암부와 명부의 어지러운 교차가 그런 인상을 준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그의 그림이 우리를 데려 가는 곳이 작가의 어떤 한 때, 혹은 아직 오지 않은 꿈인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작가의 작업 방식 을 고려하면 문제는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 그는 한 때 마음을 다해 찍었던 사진을 뒤늦게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을 동화적/환상적인 톤으로 그린다. 환상적으로 그린다는 건 날조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는 이 날조의 방식으로 시간이 지나 식은 이미지, 버려질 이미지를 소생시킨다. 여기서 특이한 지점은, 그림을 위한 것이라면, 그리고 개인적인 기억을 표현 하기 위함이라면 굳이 식은 이미지를 소생시킬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애초에 살아있는 이미지를 사용하 면 안 되는 걸까? 왜 류지민은 이미지를 방치할까? 작가는 낯선 이미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에게 낯선 이미지란, 잡초처럼, 오랜 시간 버려 진 익명의 이미지다. 그것은 너무 오래 버려졌기에 스스로 맥락을 지우고, 기억 없는 기억이 된다. 작가는 이국의 환상적인 이미지보다, 이렇게 버려진 이미지를 더 흥미롭게 여긴다. 이를테면 작가는 가족이 거주 하는 호주에서도, 현재 거주 중인 한국에서도 이미지를 ‘채취’하는데 (호주 흰 따오기를 포함해) 이 이미지 들은 모두 국적이나 기원이 삭제된 채 그림 속으로 섞여 들어간다. 이국의 정서 같은 것은 작가의 작업 과정에서 모두 깨끗하게 지워진다. 그리고 얼기설기 이어진 이미지들은 서예원의 경우와 달리, 그 이음새 를 숨긴 채 하나의 이미지, 하나의 장면, 하나의 연극이 되지만 어쩐지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의심스러 운 분위기가 어른거린다. 무엇이라 이름 붙이기 어려운 애매모호함이 류지민의 그림에 있다. 이 장소는 전혀 과거가 아니다. 이미 과거의 맥락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작가가 언젠가 당도하 고자 하는 곳도 아닌 것 같다. 유토피아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기이한 분위기를 띠기 때문이다. 꿈 역시 아니다. 개인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작가가 그린 것이지만 이제 작가와 상관없어진 사물 들로 이루어진 곳, 최대한으로 낯선 곳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비현실적으로 그려졌기에 현실과 다른 곳이 라거나, 환상적으로 그려졌기에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림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낯선 얼굴을 하고 현실에 말을 거는 것이다. 그곳은 어디입니까?
_ 글 (정영수 비평가)